교묘한 속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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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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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음주의는 복음의 이름을 빌린 새로운 자유주의다-
오는 10월 27일부터 사랑의교회 주최로 열릴 예정인 WEA(세계복음주의연맹) 서울총회를 앞두고 교계가 뜨겁다.
오정현 목사가 속한 예장합동 교단이 WEA 회원이 아님에도,
그가 이 대회를 사랑의교회 주도로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그들은 “WEA는 복음주의의 정통을 잇는 단체이고, 근본주의자들이 불필요한 공포를 조장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사적 흐름을 살펴보면, 신복음주의는 복음주의의 이름을 빌린 또 하나의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이 논쟁의 본질은 단순히 ‘행사 찬반’이 아니라,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의 정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1. 신복음주의는 출발부터 근본주의와 대립했다
1947년 해럴드 오켄가(Harold Ockenga)가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할 때,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근본주의의 분리주의를 거부하고, 문화와 사회 속으로 들어가 복음의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 한 문장 안에 신복음주의의 정체가 담겨 있다.
그들은 근본주의의 ‘분리’ 대신 ‘대화와 참여’를 택했다.
그 결과,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의 경계선을 흐리며 등장했다.
오켄가와 칼 헨리, 빌리 그레이엄 등이 주도한 풀러신학교와 Christianity Today는 이 새로운 노선을 제도화한 기관들이었다.
박형룡 박사는 이미 1958년 『현대신학비판』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의 사상을 일부 수용하여 진리와 비진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가 비판한 대상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진리를 수호한다 하면서 자유주의와 손잡은 사람들”이었다.
즉, 박형룡은 신복음주의를 복음주의의 이름으로 포장된 자유주의의 변형된 형태로 본 것이다.
2. 빌리 그레이엄의 포용주의적 구원관은 명백한 사실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초기에는 열정적인 복음전도자로 존경받았지만,
말년에는 가톨릭, 정교회, 자유주의자들과의 폭넓은 연합으로 복음의 배타성을 약화시켰다.
특히 1997년 로버트 슐러와의 Hour of Power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가진 빛에 반응하면 그들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They may not even know the name of Jesus... but I think they are saved.)
이 발언은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 교리와 충돌한다.
Cathy Burns의 "Billy Graham and His Friends"와 잭 칙이 쓴 "연막" 이라는 책을 보면, 빌리그레이엄이 WCC, NCC, 가톨릭 관계자들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자들, 빌 클린턴, 심지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사역한 수많은 기록들이 나타난다. 근본주의 침례교 잡지인 Sword of the Lord의 대표, Dr. John R. Rice는 빌리그레이엄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 가다가,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서 빌리그레이엄과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그의 행보가 “진리를 지키는 전도”라기보다 “연합을 우선시한 포용주의”였음을 드러낸다.
3. 존 스토트는 로잔운동의 ‘사회복음화’를 주도했다
또 어떤 분들은 “존 스토트는 로잔 시절까지는 정통 복음주의자였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1974년의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 자체가 복음 이해를 전환시킨 사건이었다.
그 언약은 “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이라고 선언하면서 복음전도와 사회정의를 동등한 수준으로 병치했다.
이것은 근본주의자들이 경계했던 “복음의 사회화(social gospel)”의 시작이었다.
복음의 핵심은 죄 사함과 구원인데, 로잔언약은 사회변혁의 요소를 복음의 본질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 후 스토트는 『영원한 벌에 대한 관점』(1988)에서 **조건적 불멸설(멸절설)**을 제시했다.
그는 “영원한 지옥 형벌은 성경이 말하는 정의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정통 교리와 명백히 충돌했다.
영남 신학대학교의 안승오 교수님은 그의 논문에서 “스토트는 1968년 웁살라 총회 이후 사회적 복음을 중심으로 신학이 이동했다”고 분석한다.
즉, 그는 로잔 시절부터 이미 근본주의 복음주의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4. WEA의 신앙고백과 실제 행보는 다르다
WEA는 문서상으로는 “성경의 영감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구원”을 고백한다.
그러나 실제 행보를 보면, 2007년 이후 WCC, 가톨릭, 정교회가 함께하는 "글로벌 기독교 포럼(GCF)"에 정회원으로 참여하며 공동성명서를 발표해 왔다.
2021년에는 WCC 총무와 WEA 총무 토마스 슈마허가 “상호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공식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진리 안의 연합”이라기보다 교리적 경계가 희미한 포용적 연합의 전형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 잭 칙(Chick)의 책 『연막(Smokescreen)』은
“WEA는 보수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WCC와 병행하는 세계교회 일치 구조 속에 들어갔다”고 지적한다.
이 주장의 일부 과장을 제쳐 두더라도, WEA가 더 이상 ‘WCC의 대항세력’이 아니라 ‘대화 파트너’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5. 진리를 포기한 연합은 배신이다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는 시대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들이 남긴 것은 복음의 경계선을 흐린 신학적 유산이었다.
연합은 중요하지만, 진리를 포기한 연합은 결코 복음적이지 않다.
엘리야 시대에도 아합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너냐”고 꾸짖었지만,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신 이는 엘리야가 아니라 진리를 버린 아합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분열을 피하자”는 이유로 진리의 기준을 희생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배신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다.
진리 위에 세워진 연합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연합이다.
-이 글은 신복음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글로, 논쟁이 아니라 분별을 위한 글입니다.-
이 완구 권사(맑은샘내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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