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도 다수결로 결정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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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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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사랑과 공의 뉴스 대표이신 박온순 목사님께서 [호남연회에 속한 정## 목사에 대한 이단 논쟁,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제목의 논평을 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감리교 전체 목사님들과 일부 장로들에게 이 내용을 문자로 보내셨습니다.
그 결과 그동안 이 사건을 몰랐던 많은 목사님들이 비로소 상황의 본질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논평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주로 목사나 장로가 댓글을 썼을텐데도 전혀 영적으로 분별을 못하는 사람들이 쓴 댓글도 있었습니다. 진리를 다루는 일인데도, 마치 정치적 진영 논리나 좌우 이념의 문제로 오해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댓글들은 그냥 웃어 넘기고 말았지만, 해당교회의 한 장로님이 남기신 댓글은 자못 진지하면서도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 장로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기도 하고, 한때 존경하던 어르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 분의 글에 긴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 장로님은 문제가 된 교회의 정목사가 굉장히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하시고, 그 목사의 설교를 듣고 교인 1000여 명 중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오직 저 혼자만이 이의를 제기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마치 다수결의 원칙으로 정의하는 듯한 댓글을 썼습니다.
즉, 다수가 동의하면 진리이고, 한 사람이 반대하면 그릇된 것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 앞에 홀로 섰습니다.
만일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의 기준이라면, 그 당시의 이단은 엘리야였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평강하다" 외치던 수많은 제사장들 사이에서 홀로 눈물로 외쳤습니다.
진리를 붙든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그 장로님은 전교조도 하셨고 논리가 정연하고 세상적으로는 훌륭한 분이지만,
너무 담임 목사를 두둔하다보니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리보다 사람을 더 크게 본 것이지요.
그 교회의 다른 장로들도 그분의 의견에 동조하며 담임 목사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저를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심지어 그 교회의 어떤 장로는 예배시간의 대표기도를 하면서 "자기의 지식을 이용하여 교회의 행사마다 방해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꼭 기억하여 주옵소서" 라고 저주하는 기도를 회중 앞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명예훼손으로 형법상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될 수도 있는 범죄였지만, 저는 이 일을 사회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생각하여 그렇게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장로들 및 장로 가족들, 심지어 익산의 감리교 목사님들 중 상당수가 제게 치료받으러 오시다가 이 일이 있은 후 대부분 발길을 끊었습니다.
물론 그 분들에게 다시 오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안오니까 더 제 마음이 더 편합니다.

아래는 그 댓글에 대한 저의 반박 댓글입니다.
이 글을 다시 신문에 싣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이것이 특정 개인의 다툼이 아니라, 감리교 전체가 직면한 신학적 위기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언제부터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 시작했습니까?
교회가 진리를 보호하지 못하면, 결국 진리가 교회를 떠나고, 한국 교회는 유럽의 교회처럼 껍질만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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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님 오랫만에 이 곳에서 뵙는군요
장로님의 댓글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다가, 그래도 장로님께서는 교회의 어르신인데 뭐가 잘못인지 깨우쳐는 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댓글을 쓰니 넓으신 마음으로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천여명의 성도 중에 “이의를 제기한 단 한 사람”이라는 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외친 사람은 언제나 소수였고, 때로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앞에 홀로 섰고,
예레미야는 “평강하다” 외치는 다수의 제사장과 선지자들 사이에서 고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 회중의 합법적 결의”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한 명뿐이다”는 말은,
진리를 부정하는 다수의 안일함을 드러내는 증거이지 결코 정당화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천 명이나 되는 교인들, 20명이 넘는 장로들 중에 단 한 사람인 저 혼자만이 설교의 문제를 분별했다면 — 그 교회는 도대체 얼마나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교회입니까?
오히려 부끄러운 줄 아셔야지 이렇게 댓글에 당당하게 쓰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민주주의 제도처럼 다수가 동의하면 진리이고, 한 사람이 외치면 비진리가 되는 ‘진리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게 되었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목사나 장로들에 의해서 교회가 인본주의적인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양편의 말을 다 들어야 한다”는 말의 허상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말은 언뜻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신학적 문제를 도덕적 중립의 문제로 바꾸는 왜곡입니다.
“양편의 말을 다 들어야 한다”는 것은 정치나 사회 갈등의 조정 방식일 뿐,
복음의 진리 문제에서는 ‘양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유투브로 그 날의 설교가 다 녹화되어 있습니다. 제가 그 설교를 짜집기 한 것도 아니고 설교 내용을 그대로
보고 글을 쓴 것인데, 양편의 의견을 들으라 하심은 변명할 기회를 달라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군요.
복음은 본질상 흑백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있다”거나 “불신자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이미 진리의 경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대화”나 “상호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즉각적 회개와 회복의 영역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이 문제를 장로님 뿐 아니라 다른 장로님, 부목사님. 정OO 목사에게 이야기 했을 때, 장로님들이 제 말을 수용하고
정목사에게 회개를 촉구했어야 맞지요. 이제 와서 양측의 이야기를 들어라고 하시는군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리교 정신과 이상을 실현하려 한다”는 주장도 참 그럴듯하면서도 위험합니다.
이 표현도 감리교의 본질을 오해한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성결과 복음의 일치”를 강조했습니다.
즉, 감리교의 이상은 윤리적 진보나 사회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설교하지 않고, 성령의 내주를 왜곡하며, 다원주의적 복음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감리교의 정신이 아니라 감리교를 파괴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혼합물입니다.
그런데 정목사의 설교는 무척 인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입니다.
정목사의 설교 중에서 신본주의 반대가 자본주의라는 말은 공산주의가 신본주의와 비슷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공산주의자 신영복의 책을 인용하는 것이며, 느헤미야 연구원 배덕만 교수를 강사로 초빙하는 것은 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 성찬주일을 지켜서 카톨릭과 일치하려는 행위는 감리교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인지요?
감리교 헌법에도 없는 열린성찬이란 것으로 교회에 처음 나온 세례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 감리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저는 교회 내 갈등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병들게 하는 거짓 복음과 타협한 침묵을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본주의와 혼합될 때,
침묵하는 다수가 진리의 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한 사람의 외침이 교회의 양심을 깨우는 불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다수의 침묵보다 한 사람의 진실한 외침이 더 하나님 앞에 가치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장로님. 목사를 편들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편드십시요.
잘못된 목사의 편을 들다가 장로님마저 이단옹호자가 될까 걱정이 됩니다.
예수님의 편을 드는 자는 핍박을 받아도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지만, 이단의 편을 들다가는 그 결말이 어찌 될 지 끔찍하군요.
다소 무례하게 느껴진다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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