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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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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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신학의 이단성-
사순절을 앞둔 어느 교회의 유투브 온라인 예배를 시청한 적이 있다. 그 설교는 흥미로운 듯하면서도 매우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창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 사순절 기간 동안 탄소금식을 하자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지구 환경과 자연 만물의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설교자는 인간이 자연을 "착취"해 왔으며, 그로 인해 발생한 생태계의 파괴를 탄소 절제 운동으로 회복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이 설교는 생태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으며, 전통적인 기독교 구원론과도 충돌하는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왜 이런 설교가 강단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WCC의 영향력을 그 목사가 분별없이 수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WCC(세계교회협의회)는 3차 총회(1961)에서부터 ‘우주적 화해’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4차 총회(1968)의 주제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였으며, 7차 총회(1991)에서는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를 주제로 내세웠다. 이 주제들을 보면 WCC의 구원론이 점점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복음의 핵심에서 멀어지고, ‘만물의 회복’이라는 막연한 종교윤리 혹은 생태적 회복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WCC는 이후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 생명의 불균형도 죄의 본질”로 간주하게 되었고, 만물 회복설은 이러한 신학적 전환의 결과물이다. 그리하여 전통적 기독교 교리인 죄와 지옥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 개념은 약화되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라는 다소 모호하고 철학적인 주장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신학자는 독일의 위르겐 몰트만이다. 그는 『희망의 신학』(1964)과 『창조 안의 하나님』(1985)에서 하나님의 고난, 자연과의 연대, 창조 질서의 회복을 강조하며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상호성(interconnectedness)을 말하기 시작했다. 몰트만의 정치신학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그리고 생태신학으로까지 이어졌고, 특히 자연을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구원의 대상, 심지어 고난을 공유하는 존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상은 프랑스의 신비주의자이자 진화론자인 테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테이야르는 인간의 구원을 우주 전체의 진화 속에 위치시키며, 그리스도를 ‘오메가 포인트’라 불리는 우주의 완성점으로 해석했다. 그는 물질과 영의 통합, 자연과 신성의 융합을 주장하며 우주적 그리스도론이라는 사상을 펼쳤고, 그의 영향은 생태신학과 뉴에이지 운동에까지 퍼졌다.
이처럼 생태신학은 피조물 안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 사상을 전제하고,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영적 본질과 회복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을 명확히 구분하고, 구속의 주체를 오직 하나님으로 삼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실제로 생태신학자들은 불교, 힌두교와 유사한 만물의 영성, 피조물 숭배, 에너지 개념 등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 뿌리는 명백히 뉴에이지 철학이나 자연신앙(애니미즘; animism)과 닮아 있다.
또한,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거나 개발하는 것을 '착취'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 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갈등 구조를 설정하고 이념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구조는 매우 선동적인 색채를 지닌다. 이런 용어는 설교에서 사용하기에 무척 부적절하며, 설교에서 사용할 때는 그 이념적 배경과 의도를 반드시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을 존중하고 아끼는 것이 마땅하다. 프란시스 쉐퍼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을 중심으로 한 태도이며, 구속의 주체가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있거나 인간의 노력으로 환경을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은 창조세계의 회복이 인간의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며, 그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생태계 회복의 상징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실제 사건이며,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피조물의 회복도 성경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결국 생태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또 다른 얼굴이며,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다른 복음’이라 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피조물에 신성을 부여하거나,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구속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자연의 회복이 곧 복음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로마서 1장에서 경고하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 결과이며, 골로새서 2장에서 바울이 경고한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빠진 모습일 수 있다. 참된 복음은 죄와 심판, 그리고 은혜로 인한 구속을 말하며, 그 복음은 결코 시대의 철학이나 정치적 유행에 따라 변형되거나 보완될 필요가 없다. 교회는 이러한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말고, 언제나 복음의 본질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완구 원장(맑은샘내과/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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